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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공에서 길을 찿다

땅에만 길이 있는 게 아니다. 하늘에도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에도 여러 갈래 길이 있다. 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길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엎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함박눈이 발목을 덮는 밤, 길 위에서 첫사랑의 황홀한 키스도 했다. 길 위에서 사랑을 하고 길 위에서 작별했다. 그대 떠나간 길 되돌아 오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졌다.   고향집 떠나는 날, 탱자나무 앞에서 소처럼 크고 선한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머슴아이, 새끼손가락 걸며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 애는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겠지. 유년의 책갈피에 맺은 언약은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작은 화석으로 남는다.   에드워드 호퍼의 ‘길 위에서’ 전시회가 서을시립미술관에서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성황리에 열린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잠든 호퍼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도시의 일상적 공간을 그린 조용하고 비개성적인 인물들이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들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고독, 고립, 단절, 소외감 등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하다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파리로 간 호퍼는 생동감 넘치는 파리지앵들을 관찰하며 심리적 풍경묘사라는 독특한 특징을 작품 속에 담는다. 여행은 호퍼의 그림 속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전시 제목 ‘길 위에서’는 호퍼의 고향 뉴욕에서 자주 찿았던 파리, 뉴잉글랜드, 케이프코드로 가는 길 위에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성숙시킨 호퍼의 내면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미국 국민화가’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관객을 슬프게 하지 않는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지만 절제된 선, 빛과 어둠을 가르는 선명한 색체로 내면의 아픔을 정화시킨다.   광대는 하늘에서 길을 찿는다. 광대는 허공에서 줄을 탄다. 광대줄타기는 줄광대라고 불리는 연희자가 높이 3미터의 허공에 매어져 있는 35미터의 외줄 위에서 삼현육각과 어릿광대를 대동하고 줄 위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연희하는 놀이다. 줄광대는 관객과 직접적으로 또는 어릿광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대화하며 줄타기연행을 풀어나간다. 삼현육각 협연자와 호흡을 맞춰 기예를 선보일 뿐만 아니라, 새타령이나 중타령 등을 통하여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군다.   2011년 줄타기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 유산으로 등재된다. 정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보존, 전수하고 김대균 명사가 제2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9살 때 줄타기를 시작한 김대균명사는 15세에 첫 신고식을 올린 뒤 줄이 끊어지는 사고로 당하지만 외줄 인생의 무서운 집념으로 다시 줄 위에 선다. “줄 위에 있는 순간 모든 근심 사라지고, 자신을 내려 놓는다”고 그는 말한다.   인생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하는 곡예사의 나팔 소리다. 나침반 없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찿아 나선다. 광대가 허공에서 줄타기 하듯 꽹과리 소리가 멈출 때까지 춤추기를 포기할 수 없다. 번쩍이는 재주와 용맹만으로 길을 찿기 어렵다. 중심을 잘 잡고, 주변의 잡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길이 열린다.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지고 만나는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벼랑 위에 걸쳐진 밧줄 움켜쥐고 길을 걷는다. 광대가 줄을 타듯 허공에서 길을 찿는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공 에드워드 호퍼 호퍼 예술 갈래 길이

2023-06-20

[잠망경] 찹수이(Chop Suey)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1882~1967)     뉴욕 근교 소도시 나이액(Nyack)에 있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생가(生家) 박물관을 찾아간다. 나는 호퍼의 그림을 참 좋아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자’라 불리는 그는 생전에 자기가 ‘인상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45일이 지난 1942년 1월 21에 완성된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 Nighthawks’를 음미한다. 일본의 본토 침략에 대비해서 공습훈련이 있던 때다. 썰렁한 다이너에 앉아있는 남녀의 표정이 보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한다. 당신도 아마 이 그림을 몇 번 무심코 보았을지 모르지. 구글 검색을 하면 금방 화면에 뜬다.   등장인물들의 마음속에 나를 투입한다. 넓은 땅에서 다져온 개척정신의 어려움, 당시 미국인들이 체험하던 전쟁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개인주의와 자유경쟁의식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느낀다.   ‘밤샘하는 사람들’보다 13년 전, 1929년 호퍼의 그림 ‘Chop Suey’를 감상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음식점’으로 알려졌다. 두 그림 다 식당이 배경. 야간식당에는 남자 셋, 여자 한 명, 그리고 햇살이 대각선으로 펑펑 쏟아지는 중국식당에는 반대로 여자 셋, 남자 하나가 앉아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Chop Suey’는 1884년에 생겨난 영어다. 웹스터 사전은 이 말의 발생처를 중국 광동어(廣東語)로 삼는다. 중국 발음 ‘잡수이’가 ‘찹수이’로 변한 것. ‘잡(雜)’은 잡동사니를, ‘수이’는 쪼가리를 뜻한다. 우리 사전은 찹수이를 ‘다진 고기와 야채를 볶아 밥과 함께 내는 중국 요리’라 풀이하는데 인도에서는 비슷한 요리를 ‘잡차이’라 부른다. 우리말 발음과 거의 똑같다.   호퍼 생가 박물관의 나이 든 안내자는 일부 미술해설자들이 지적하는 호퍼가 보여주는 외로움과 대화의 단절에 대하여 언급한다. 호퍼는 결코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극구 주장한다. 나는 그녀에게 외로우면 안 되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외로우면 큰일 나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 호퍼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꾹꾹 참으며 그림을 그리면서 삶의 갈등을 승화시켰다는 보고를 읽는다.   그 좁은 공간에 호퍼의 작품이 몇 점 되지 않지만 그가 마주하던 허드슨 강을 같은 방, 같은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물결친다. 나중에 온라인을 통해서 그의 그림을 다시 곰곰이 감상한다. ‘찹수이’ 여주인공의 짙은 립스틱에 대해서 논평하는 글을 숙독한다.   하릴없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아니더라도 그녀는 스스로 삶의 의욕을 북돋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그림이 2018년 11월에 크리스티 옥션에서 물경 9200만 달러에 매각된 이유를 알겠다.   ‘밤샘하는 사람들’은 호퍼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미국의 가부장적 사나움과 어두움을 대변하기 때문일지. 호퍼의 ‘사실주의’를 굳게 믿는 사람들이 그림에 나오는 다이너를 찾아내려고 그가 살던 맨해튼 남단 그린위치 빌리지 근처 다이너를 이 잡듯이 뒤져봐도 헛수고였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한 미술평론가는 호퍼의 그림이 ‘관찰과 상상과 기억의 컴비네이션’이라 논술한다. 관찰도 상상도 메모리도 결코 100% 객관적일 수 없으려니. 예술에 있어서 사실주의(Realism)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현실적 상상과 현실을 잡채처럼 섞는 비결을 체득한 호퍼! 그의 사실적인 묘사에 비장된 코드를 감지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chop 에드워드 호퍼 호퍼 생가 웹스터 사전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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